"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삼상 5:6, 9, 11).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빼앗기 전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상당히 괜찮은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삼상 4:8).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따라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와께서 치명적인 재앙을 퍼부으셨을 때 그들은 두 번째 "출애굽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삼상 5장 참조).
하지만 이것이 아무리 놀랍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다른 전략적 병행을 통해 이 이야기에서 밝혀지는 또 다른 신학적 진실을 봅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 놀라운 구절을 읽게 됩니다: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삼상 5:12). 이 구절이 왜 그렇게 놀라운 것일까요? 고통받는 블레셋 사람들과 이집트에서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병행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이러한 유사점을 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우리의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갈구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일뿐만 아니라,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이 겪는 고통의 인간적인 측면을 잊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요. 특히 그들이 스스로 고통을 초래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적들이 무기를 내려놓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멈추고 대신에 구원과 인자하심을 구하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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