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삼하 11:11).
우리아의 이 말은 우리아 자신보다 다윗에게 더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아는 단지 자신의 충성심을 선언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인가요? 그의 모든 말에는 다윗 왕이 회개하도록 무릎을 꿇게 하려는 예언적 통찰력의 힘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선언함으로써 다윗이 배신했다는 것을 확신시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궤를 위해 싸우려고 넓은 들판의 임시 초소에 머물고 있을 때, 당신은 집에 머물면서 먹고 마시고 내 아내와 동침하였군요!" 내 주(즉, 요압)에게 “나는 이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야는 다윗이 그의 주인 사울을 해치기를 거부했을 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말로 다윗의 얼굴을 때리고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 24:6). 그리고 또한 이 정확한 말로 우리아는 간통죄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보디발의 아내에게 했던 요셉의 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우리아가 무엇을 알았든 몰랐든,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분명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다윗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감추려고 했고, 그의 간음죄는 속임수와 살인죄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발각되는 것보다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 늘 훨씬 낫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결과는 숨겨진 죄가 발각되는 것만큼 나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죄를 감추려면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죄는 항상 이전 죄보다 더 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이것을 나쁜 상황을 훨씬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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